강경성결교회 성지
교회의 시작
교회의 시작
기독교대한성결교회 강경교회는 1918년 10월 18일 경성성서학원에서 수학한 평안남도 평원출신 정달성(鄭達成)전도사가 한국 동양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강경에서 사역하면서 개척된 교회이다. 일본 동양선교회(OMS)는 미국 선교사(카우만, 길보른)들의 선교정신에 의해 노방전도, 축호전도를 통해서 구도자가 모이면 초교파적으로 거주지에 있는 기존교회에 출석하도록 권하는 순수 복음전도 방식을 취했다. 사중복음의 교리로 한국에서 전도사역을 시작한 김상준과 정빈 전도자 역시 선교사들의 뜻에 따라 서울에서 '경성복음전도관'과 '경성성서학원'을 설립하여 운영했으나 지역교회 설립과 교단 조직은 관심 밖이었다. '경성성서학원'에서 졸업생이 배출되자 전국지역으로 분산하여 전도하게 되었고, 지역에서 교회를 설립하는 숫자가 점차 늘어나 필요에 의해 조직을 구성하면서 한국성결교회가 교단으로 발전하게 된다. 한국성결교회가 충남지역을 중심으로 포교하게 된 것은 '경성성서학원' 학생들이 충남 부여군 규암에서 여름수양회를 개최하면서 그 지역에 믿는 자들이 생기고 그들의 신앙을 관리하고 돌보기 위한 방편이 필요해졌던 것이다. 특별히 1911년 11월 경 호남선 철도 개통으로 강경역이 개설되었고, 강경포구를 중심으로 수륙 양쪽으로 교통이 좋아졌고 이에 따라 교역량이 활발해져서 많은 사람이 모이고 활동하는 도시화가 이뤄진 것이다. 또한 넓은 곡창지대(황산벌, 논산평야, 김제평야, 익산평야)에서 생산된 다양한 농산물의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강경포구를 중심으로 해상운송 및 어업이 발달했다. 이런 풍부한 경제상황은 선교적 입장에서도 포교활동에 유리한 곳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 결과로 강경에는 1896년부터 침례교회와 감리교회 그리고 구세군 선교사들이 교회를 설립하기 시작하였고 전도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양선교회도 경성성서학원의 조선인 신학생들을 발굴하며 이곳 강경으로 파송하며 전도활동에 뛰어들게 된 것이다. 그 결과로 우리 강경교회가 일찍부터 이곳에 자리잡게 되었다. 강경교회를 시점으로 함열, 병촌, 노성, 채산, 채운, 소양으로 교회설립이 이어졌던 것이다.
강경은 논산과 김제평야의 물류중심지며, 군산으로 곡물 등을 해상으로 운송하기에 용이하여 일본으로 나르는 거점도시 인데다가 육로를 통해서 논산, 부여, 규암, 은산, 홍산 등지로 인력거나 자전거 또는 말을 이용한 운반수단과 강경포구에서 나룻배를 이용하여 여러 곳으로 이동수단이 용이했던 곳이다. 일본 동양선교회가 초대 조선감독으로 파견한 영국인 존 토마스(John Thomas)선교사와 미국인 어네스트 길보른(Ernest Albert Kilbourne)선교사 그리고 김상준과 박제원 전도자가 규암으로 가기 위해 강경역에 도착하고 보니 저녁이 되었던 것이다. 길보른 선교사는 저녁 시간을 이용하여 강경역 뜰에서 사중복음을 담은 야외집회를 하게 되었고, 설교를 듣기 위해 모여든 100여 명 중 감동받은 30여명의 신자들이 교역자 파송을 요구하게 되어 당시 규암(1913년)과 은산(1914년), 그리고 홍산(1915년), 금천(1916년)에 연이어 이곳 강경에도 복음전도관을 세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경유지였던 강경에 정달성 전도사(경성성서학원 7회 졸업생)을 1918년 10월에 파송하고, 강경복음전도관(현 강경성결교회)을 설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최초 일본역사교육 거부사건(강경상애소년단 사건)
최초 일본역사교육 거부사건 (강경상애소년단 사건)
1924년 이미 강경보통공립학교 내에 항일정신으로 무장된 아이들이 있었다. 이 때부터 보통학교에서 조선사를 빼고 일본사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역사 시간에 조선인 선생을 전출시키고 일본인 선생이 오자 윤판석이 속한 '강경 상애소년단' 중심으로 일본 역사교육 거부 사건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조선인 선생을 내보내고 일본인 선생을 통해서 일본 역사를 가르치자 윤판석을 중심으로 상애소년단 친구들이 일본인 교사를 교단에서 끌어내리는 등 거부운동을 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윤판석은 교장실에 끌려갔고, 교장이 일본역사수업 거부사건에 대하여 꾸짖자 윤판석이 따져 물었다. ‘우리가 조선 사람인데 왜 일본역사를 먼저 배워야 합니까?’ 일본 교장이 윤판석에게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지 무슨 말이 많으냐'고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윤판석은 그 동안 학교에서 있었던 일본교장의 만행이 떠올라 홧김에 테이블 위에 있던 사기그릇 차종지를 교장선생님의 얼굴에 집어 던졌고, 차종지를 맞은 교장의 머리에 상처가 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강경상애소년단 아이들과 윤판석은 더 이상 학교를 못다니게 되었고, 이후 독립운동가로 활동하게 된다. 이와 같은 역사교육 거부운동이 일어난 곳이 강경이다. 윤판석과 같은 민족의시과 투철한 신앙정신을 심어주는 데 많은 영향을 준 것이 강경교회이고, 그 당시 사역자이 이인번 전도사님과 백신영 전도사님이었다. 아래에 소개 되어 있지만, 백신영 전도사님은 대한애국부인회 사건에 주동자였고, 옥고를 치루고 병보석으로 풀려 났지만 일본 경찰의 요주의 인물이 되어 겉으로는 항일 활동을 접은 것처럼 보였으나 강경교회에 부임해서(1922년) 전도부인으로 활동하면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항일정신을 심어주는 훌륭한 역할을 하신 분이시다. 이 백신영 전도사의 영향을 많이 받은 분이 바로 윤판석 장로님이시다.
최초 신사참배 거부사건
최초 신사참배 거부사건
“절대로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 1924년 10월11일,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를 강요당했던 강경교회의 김복희 여교사와 57명의 주일학교 학생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이에 따른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일제 치하에 놓인 조선은 일제에 의해 자행된 민족정신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신사참배를 강요당한다. 하지만 1919년3월1일 만세 운동과 '대한애국부인회' 결성에 동참했던 강경교회의 백신영 전도사는 성서의 말씀과 기독교 신앙에 근거해서 이이들과 성도들에게 신사참배의 죄악성을 가르친다. 이후 1924년 10월 일제는 신사의 제일(참배일)을 맞아 강경공립보통학교 학생에게 신사에 참배하는 시간을 갖도록 지시한다. 이에 다른 교사와 학생들은 모두 신사에 참배하지만, 강경교회 주일학교 교사 김복희 선생과 주일학교에 다니던 57명의 학생은 “신사참배는 무지한 미신이며 우상에게 절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가 되므로 절대 절하지 않겠다.”고 단호한 신앙의지를 밝히며 신사참배를 거부한다. 이를 알게 된 학교 측은 신사참배 거부행동이 잘못된 것임을 인정하고 시정하라고 요구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교사는 면직시키고 학생들을 퇴학을 시키겠다고 위협한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과 항거정신으로 똘똘 뭉친 김복희 선생과 62명의 학생들은 당당히 학교 측의 요구를 거부한다. 결국 최초의 신사참배 거부사건은 큰 문제로 확대된다. 당시 조선총독부에 보고되고, (동아일보)(조선일보)(기독신보)등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며, 첨예한 사회적 이슈로 공론화 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총독부와 충청남도교육청에서 관계자가 내려오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학교는 학부형 회의를 통해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학부형들의 입장은 “우리도 조상께 제사하는 날이 있는데 이 아이들이 교회에 나간 뒤부터는 절하지 않는다. 때려보기도 하고 달래보기도 했지만 말을 듣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아이들의 행실이 나빠진 것도 아니고 오히려 더 성실해졌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우리로서는 더 이상 뭐라고 말할 수 없노라”고 하며 오히려 신사참배 거부를 옹호한다. 결국 신사참배를 시켜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된 일본교장은 김복희 교사에게 권고사직을 요구한다. 하지만 김복희교사는 “내가 면직을 당하면 당할지언정, 권고사직은 하지 않겠다. 면직시키고 그 이유를 신사참배라고 명시하라”고 항변하며 스스로 면직을 택한다. 또한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62명 중 많은 학생들이 퇴학처분을 당한다. 그 62명의 학생들 중에 57명의 아이들이 우리 강경성결교회 주일학교 어린이였고, 김복희 선생도 강경성결교회 주일학교 교사였으며, 그 아이들 중에 윤판석도 들어 있었다. 이처럼 김복희 선생과 57명의 아이들에게 투철한 민족정신과 우상숭배가 죄 임을 알고 철저히 거부하는 신앙심을 가르치고 심어 준 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 당시 강경교회 교역자로 시무했던 이인범 전도사(경성성서학원 9회 졸업)와 백신영 전도사(경성성서학원 6회 졸업생)의 사역의 열매이고, 교역자들의 신앙지도가 이와 같은 역사적 사건을 만들었던 것이다.






존 토마스 선교사의 피와 눈물이 서려있는 한옥예배당
존 토마스 선교사의 피와 눈물이 서려있는 한옥예배당
1918년에 최가의 집 두 채를 빌려 개척한 정달성 전도사는 전도활동 중에 교회 건물이 미약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게 되면서 교회당 건축이 절실했다. 그래서 도움 요청하는 선교편지를 여러 곳에 보내게 되었고, 이 편지가 당시 성결교회 초대감독이었던 영국 선교사 존 토마스 목사에게도 전달되었고, 여러차례 고민 끝에 교회 부지매입 차 강경에 방문하게 되었다. 1919년 3.1운동 벌어졌을 당시 영향으로 강경 옥녀봉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날도 토마스 목사는 부지매입 장소로 알아보며 발품으로 평수를 재고 있었는데 몇몇 청년들이 만세운동을 한 것이다. 근처에서 호각 소리가 들리자 만세운동을 하던 청년들은 도망가고 일본 사람이 현장에 도착해보니 태극기를 든 사람들은 없었고, 미국인으로 보이는 토마스 일행이 보였던 것이다. 일본 경찰은 미국인처럼 보이는 존 토마스를 만세 운동의 주동자로 여기고 달려들어 각목으로 무차별 구타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아무 영문도 모른 채 토마스선교사는 몰매를 맞아 스무아홉 군데 골절상을 입고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경찰서로 연행되어 조서를 받게 되었다. 조사 과정에서 미국인이 아닌 것과 만세운동 주동자가 아니라 선교사 인 것이 밝혀지게 되자, 일본 경찰은 저지른 문제를 덮기 위해 빨리 합의를 하려고 했다. 토마스 선교사는 이 억울함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자신의 나라인 영국에 재판을 호소했고, 이 문제는 영국과 일본의 외교 분쟁으로 번지게 되었다. 당시 초대영제국이었던 영국은 억울한 일을 당한 자국민에 권익에 대해 강하게 변호했고, 급기야 일본정부는 영국에게 정식 사과하게 이른 것이다. 이어 치료비와 위자료로 막대한 돈(당시 5만불)을 지급하게 된다. 대신 토마스 선교사도 선교활동을 금하고 조선을 떠나는 조건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이것으로 선교사 구타사건이 일단락 되었지만, 그 이후로 이와 연관된 감동의 이야기가 전개 된 것이다. 이후 교회 건물이 열악해서 교회 건물을 짓기 위해 기도하던 이인범 전도사(강경교회 3대 교역자)와 백신영 전도사는 전국 각지로 도움의 손길을 호소하였다. 강경교회의 교회건축을 위한 모금후원 편지가 기적과도 같이 이역만리인 미국으로 건너가 요양을 하고 있던 존 토마스 선교사의 손에 전해 지게 된 것이다. 토마스 선교사가 이 편지를 받아드는 순간 조선에서의 억울하고 아쉬운 마음이 걷히고 깊은 하나님의 뜻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젊은 시절 동양의 조선인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해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조선에까지 가서 사명을 감당하던 그에게 구타사건은 큰 실망을 안겨 주었었다. 그 구타사건에 원인이었던 강경교회에 교회건축에 대한 호소문은 토마스 선교사에게 남다르게 다가왔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느끼며 큰 헌신과 결단을 내리게 되면서 펼치지 못했던 못 다이룬 조선인 선교의 꿈에 대한 아쉬움을 덜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토마스 선교사는 강경교회를 건축에 필요한 만큼을 그 일체를 후원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그가 구타당한 일로 인해 받게 된 위자료(배상금)를 헌금으로 보내 주었던 것이다. 그 당시 받은 배상금은 상당히 큰 금액이었다. 그 일부만으로도 교회건축이 충분할 정도로 액수가 컸던 것이다. 결국 강경성결교회 한옥예배당은(1924년) 존 토마스 선교사의 매맞은 그 값으로 지어지기에 이른 것이다. 이와 같이 여기 강경교회 한옥예배당에는 한 선교사의 피와 눈물이 서려 있다.
이후에도 교회의 존립에 많은 위기가 있었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한옥예배당을 지켜주셨다. 지금은 국가등록문화제 제42호로 등록되어 있다. 이와같이 강경교회 한옥예배당은 우리 민족의 질곡의 역사와 함께 한 교회로서 지금도 단아한 모습으로 지금까지 아름답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건축학적 특징은 당시 예배당이 'ㄱ'자 형으로 남녀유별을 가만해서 지었던 풍토와는 달리 정면 4칸, 측면 4칸 규모로 정면과 측면의 비율이 일대일인 정방형의 모습으로 전통적인 직사각형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며, 9량 구조로서 일제 강점기 한옥의 절충적인 배열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내부공간은 크게 회중석과 강단으로 나뉘어져 있다. 건물의 조형성은 전통적인 비례를 벗어나 있지만 상부의 가구구조는 기독교의 토착화 과정에 나타난 한국교회의 건축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정면 입구는 예배당을 출입할 수 있는 2개의 정문을 별도로 내고 있는데 이는 남녀유별의 유교적 유풍을 따라 남자와 여자가 출입을 따로 구분한 것이다. 고주에 결구되어 있는 대들보 위에 중보를 얹히고 그 상부에 종보가 얹히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중앙의 고주는 종보 하단까지 이어져 종보를 직접 받는다. 교회 중앙에 고주를 쌓고 이곳에 휘장을 칠 수 있도록 해 회중석을 남녀공간으로 양분 할 수 있게 하는 ‘칸막이교회’로서 바닥은 마루를 놓아 성도들의 방석을 깔고 앉아 예배를 드리도록 했으며 내부의 붉은 벽돌 주위에 회반죽 마감과 서까래를 그대로 노출시킨 연등천정은 단순한 목조건물의 구조미를 보여주고 있다. 서까래는 추녀에 뿌리를 결구시킨 말굽서까래 배열을 하고 있는데 대게 전통목조건축은 목가구의 구조적 특성으로 인해 대체로 도리방향(정면)을 보방향(측면)보다 길게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강경교회 한옥예배당은 정방형 평면을 기본으로 취하고 북쪽 중앙부를 반 칸이 조금 넘게 뒤쪽으로 물려 강단부를 만듦으로써 진입에 따른 공간의 깊이를 확보해 예배기능에 부합하도록 했다. 평면은 일반적인 가구 법에 따라 내부의 고주를 협간의 기둥 열에 맞춰 세웠고 대들보와 퇴보를 걸면 상부가구도 편리 할 뿐 아니라 내부도 본당과 측랑으로 구분되어 공간의 활용을 용이하게 하였다. 강단쪽의 고주는 하나를 생략(제주기법, 또는 감주기법)함으로써 회중석에서 강당을 향하는 시선의 장애를 없애고 강당 앞부분의 충분한 공간을 만들고 있는 것은 당시의 사회적 여건에 따르며 기능에 충실 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목조 건축에 있어서 기둥을 빼는 기법은 용이한 것이 아니며 그만큼 구조에 대한 기술적 축적이 있을 때에만 가능했던 것이다. 특히 목재의 치목수법과 가구기법은 전통적 기법에서 근대화에 따른 기술적 변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의미도 갖는다. 강경성결교회는 부흥이 되면서 홍교리로 이전 하게 되어 북옥감리교회에 매각되어 있다가 제 19대 담임인 신영춘 목사가 부임하면서 2012년에 다시 환원 시키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강경성결교회 한옥예배당은 기독교 전파 초기에 서구선교사가 한민족 고난에 동참한 사건의 결과물이라는 것과 전통적 한옥의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예배당의 고유한 목적을 위하여 전통의 유지와 변형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며, 한국 전통 한옥교회 특유의 소박함과 단아함과 성결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어두운 역사 속에서도 종말적 새 예루살렘성을 기다리는 희망 공동체의 종교 미학적 가치를 지닌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존 토마스
1919년 3월20일, 경성성서학원 초대감독이던 토마스(영국) 선교사와 한국인 사역자가(통역담당 이장하) 당국의 허가를 받아 강경에 오게 된다. 교회 부지를 돌아보고 있는데 만세운동 소리와 함께 다섯 명의 청년들이 옥녀봉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게 된다. 이후 잇따르던 일본 순경들이 선교사 일행을 발견하고 미국의 스파이로 오인하고 구타를 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토마스 선교사는 스물 아홉 군데의 골절상을 입게 되고 일본과 영국의 외교분쟁이 일어나게 된다. 결과는 일본은 토마스 선교사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였고, 존 토마스 선교사는 더 이상 선교활동을 못하고 한국을 떠나게 된다. 후일 백신영전도사가 보낸 강경교회 예배당 건축에 대한 후원 요청의 글을 보고 배상금의 일부를 보내 한옥예배당을 지을 수 있게 했다.
백신영
백신영 전도사는 대한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인해 김마리아와 함께 옥고를 치른다. 병보석으로 풀여나 1922년 강경교회로 부임하게 된다. 부임 후 그녀는 성도들에게 하나님 사랑과 민족 사랑을 가르친다. 백신영 전도사는 항일민족정신과 투철한 사중복음 신앙으로 교사들을 중심으로 신사참배의 죄악성을 가르치고 이 영향을 받은 김복희 강경보통공립학교 여교사를 중심으로 1924년 10월 10일 (강경신사창립 기념일) 최초 신사참배 거부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일본역사교육 거부사건의 주동자인 윤판석을 신앙으로 지도했으며, 역사 유물이 한옥예배당 건립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김복희
강경교회 주일학교 선생, 강경보통공립학교 여교사, 학생들과 함께 신사참배 거부를 주도, 후에 학교에서 면직됨(신사참배 이유)
윤판석
신사참배 거부 사건이 일어날 당시 일제는 학교에서 조선사를 빼고 일본사를 가르치게 한다. 역사 시간에 조선인 선생이 사라지고 일본이 선생이 오자 윤판석을 중심으로 한 상애소년단 중심으로 일본 역사교육 거부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이후 국내 독립운동가, 어린이 부흥강사, , 성청연합회, 남전도회 설립. 신덕교회 창립맴버 등의 왕성한 신앙적, 민족적 활동을 하였다.
이태석
3.1 만세운동 참여, 금산교회, 병촌교회 개척함, 6.25 동란에 퇴각하던 공산당에 의해 평양에서 순교당함
오영필
유성, 현도, 노성, 공주, 광정, 봉양, 대구동인, 대구 , 승인, 현풍, 광숭, 상월, 장벌리, 애린교회, 신사참배 거부와 천왕 심판론으로 투옥, 서울신대 총장
이헌영
신사참배 거부와 사중복음의 재림사상인 일본 천황 심판론을 굽히지 않아 투옥, 성결교단 폐쇄 때 교회 패쇄 당함, 광복 후 교회 재건. 6.25전쟁 때에도 교회를 지키며 주일예배를 쉬지 않음
한국 최초의 침례교회 예배지 “강경침례교회”
1896년 2월 9일 옥녀봉 지병석씨 가정에서 시작된 강경침례교회는 한국최초 침례교회로 충청도와 호남지역의 복음적 사명을 잘 감당한 선교기념교회로 희생적 땅과 눈물과 순교의 피가 뿌려진 강경침례교회이다. 일제 강점기 1942년 6월 10일 목사와 성도 32명이 원산 헌병대로 끌려가 협박을 받고 전치교 목사는 고문에 의해 1944년 2월 13일 옥중 순교당하였다. 그리고 제 4대 담임자인 이종덕 목사는 1950년 9월 28일 퇴각하는 공산당에게 끌려가 강경천 갈대밭에서 총살로 순교당하였다.

지역 최초 사립만동학교 유치원 설립 “강경제일감리교회”
강경제일감리교회는 1901년 창립되어 덕유정에서 예배를 드렸으며 1908년 3월에 강경 포구역을 신설하고 감리회로부터 파송받은 이용주 전도인이 1대 담임자로 부임하였다. 1913년 선교협정에 따라 황산동의 장로교회와 통합하여 황산 감리교회로 되었으며, 지역최초로 사립만동학교와 항금정유치원을 설립하여 운영하였고 2008년 100주년 역사전시관을 세운다.

6.25전쟁 66인 순교자 교회 “병촌성결교회”
병촌성결교회는 1933년 6월 15일 강경성결교회의 도움으로 논산시 성동면 개척1리 474번지 강우석 씨 집을 매입하여 세워지게 되었다. 1950년 9월 27~28일에 퇴각하는 공산당들에게 칼과 몽둥이, 죽창 등으로 무참하게 살해당하기까지 66명(남자 27명, 여자 39명) 교인이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를 당한 순교자 교회이다.
